≫ 현 한국산악회 고문, 한국 서울산악회 자문위원, 산악동지회 회원, 한국히말라얀클럽 회원
≫ 1971년 겨울등산학교(한국등산학교 전신) 개설
≫ 1963년 하계산간학교 개설
≫ 1962년 대한산악연맹 초대 이사 역임
≫ 1960년 북한산 백운산장 건립
≫ 1958년 한국 서울산악회 창립
≫ 1946년 한국산악회 가입(회원번호 118번)
≫ 1943년 백령회원 주형렬과 산행 시작
≫ 1923년 서울(당시 경기 양주) 우이동 생
"이젠 내 위로도 아래로도 남은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럴 만도 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올해 나이가 아흔 이라는 것은 차치 하고라도, 그가 말하는 위와 아래의 기준이란 한국산악회 회원번호(118번)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무살 이던 1943년 백령회원이던 주형렬(작고)씨의 소개로 산에 발을 들여놓은 후, 안광옥 선생은 장장 70년이라는 시간동안 오로지 산만 쳐다보며 살아왔다.
그사이 동년배의 선후배들은 세상을 버리거나 혹은 산을 버렸고, '평생 산귀신이 붙은' 선생은 홀로 남아 아직도 산만을 생각하며 지낸다.
선생을 만나기 위해 댁으로 전화를 넣었을 때 그는 마침 출타 중이었다.
한국산악회의 정기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아흔 먹은 노인이 직접 오토바이를 몰고, 전철을 갈아타며 양평 에서 서울까지 나갔다는 것이다.
혼자 괜한 걱정에 가슴 졸이던 기자는 그와 다시 전화가 연결된 저녁이 되어서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말에 "늙은이 얘기는 들어서 뭐하려고 그러시우?"라며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던 선생을 한참 설득한 후에야 "찾아오라"는 허락을 얻어냈다.
현재 선생은 용문산 자락에 자리 잡은 다문마을의 아담한 양옥 2층에 86세의 부인과 단둘이 세 들어 살고 있다.
원래 삼성리의 한 농장에 딸린 주택에서 기거하다가 지난해 말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했다.
"넓은 곳에서 지내다가 방한칸짜리 집으로 오니 갑갑해서 죽을 것 같다"는 사모님의 푸념을 들으니, 한평생을 산에 바친 대가가 이리도 박한가 싶어 괜시리 씁쓸하다.
선생의 등반장비들 과 산에 관련된 자료들은 둘곳이 마땅찮아, 아직 짐을 풀지도 못한 채 보일러실에 쌓아 두었다고 했다.
주형렬 씨 권유로 한산 가입, 1958년 서울산악회 창립.
"젊었을 적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 사진을 공부했어요. 거기서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취직을 했죠. 당시 내가 다니던 사진 회사 건물의 1층 모퉁이에 백령회의 주형렬씨가 등산장비점을 차렸어요. 그가 말하길 '산에 다니면 좋은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다'고 해서 그를 따라 산에 다니다가 1946년에 한국산악회에 가입했어요."
선생은 산악회에 가입한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3~4년간 선배들을 열심히 쫓아다니며 백운대 정면, 인수봉 후면, 만장봉, 우이암 등을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난리 통에 그와 함께 다니던 선후배들 중 많은 이가 월북 하거나 납북 되었고, 그에게도 월북을 종용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사회주의 청년동맹에 끝내 도장을 찍지 않고 버텨냈다.
전쟁 이후에는 한국산악회 내의 지도급 인사 중 제도권에 안주하는 것보다 순수 산악정신의 개발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동지들을 모아,
1958년에 서울산악회를 창립했다.
정인호씨를 주축으로 안광옥, 변완철, 윤현필씨 등이 중심이 된 서울산악회는 기억하기 좋게 11월 11일을 창립일로 삼아 발족했다.
산악회는 창립 초기에 주로 국내 산악인이 즐겨 찾던 설악산, 운악산, 월악산, 소백산 등지의 등산코스를 개척했다.
1959년 동아일보사의 후원으로 가게된 설악산 은 당시 서울에서 하루가 꼬박 걸리는 오지여서 장수대에서 심마니 한명을 섭외해 12선녀탕 코스를 개척했다.
이들의 이야기가 신문에 게재되며 12선녀탕의 비경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속초로 낙향했던 이기섭 박사 의 아이디어로 설악산악회(당시 관동산악회)와 서울산악회가 함께 '설악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 안광옥 선생은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말에 산에 발을 들여놓았다. 한국전쟁 때에도 사진병으로, 종전 후에는 주한미군 사진기자로 활동해온 선생은 우리 산악역사의 중요한 순간에도 늘 그 자리에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또한 월악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까지 동네 사람들이 들어갔다가 떨어져 죽는 이가 많을 정도로 험한 곳이었다.
월악산 인근의 수안보도 당시 온천이 2개밖에 없었고, 주인에게 수소문 해야 민박이 가능한 형편이었다.
다행히 산악회원들은 송씨라는 주인과 친하게 되어 그 집에서 주로 민박을 했는데, 이는 나중에 큰 도움이 되었다.
월악산 답사를 마치고 수안보로 가기 위해 동네 아이들에게 길을 물어보았다가 간첩으로 신고 당해 경찰에 끌려갔는데, 송씨가 이들을 변호해줘 안전하게 풀려난 것.
선생은 "이제는 험난한 시절에 겪은 무용담으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아찔한 경험 이었다"며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일본에서 유학을 마친 엘리트 출신답게 선생은 일어에 능통해 산악잡지 <악인(岳人)> 등을 보며 산악문화 활동에 많은 힌트를 얻었다.
그 결과 국내에서 처음으로 크로스컨트리 대회를 개최하고 등산학교 설립, 산사진 전시회, 산장건립 등 다양한 사업 을 기획 보급하는데 열정적으로 기여해왔다.
"자신이 가진 지식과 기술을 아낌없이 베풀라"
1959년 봄, 서울산악회는 북한산에서 제1회 크로스컨트리 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대회는 3인 1조의 고등부로만 20개 팀이 참가했으며, 무전기 등을 동원해 무악재~진관사~비봉~대남문~위문~우이동 코스에서 1박2일간 열렸다.
이를 계기로 1961년 대한산악연맹(정식 발족 전)에서도 광릉에서 수리봉을 거쳐 송추로 빠지는 등행경기대회를 개최 함으로써 국내에 등산대회가 널리 태동하게 되었다.
선생은 전국의 등행대회에 심판으로 초빙되어 종횡무진 활약하기도 했다.
서울산악회의 크로스컨트리 대회는 이후 관악산 일원에서 5회까지 개최되었으나, 6회 대회 준비 중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터지며 중단되었다.
북한산 백운산장은 1960년 안광옥, 변완철씨가 주축이 되어 산악회 독자적으로 재정을 확보하고 자재를 구입해 지은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만 해도 산장이 있는데 우리는 없으니, 산꾼들을 위해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산장 건립에는 산악회원 뿐 아니라,
한국산악회의 등행경기 시 참여자 들에게 모래 와 시멘트를 져 올리게 하는 등 도처에서 도움을 받았다.
"그땐 참 바쁘게 지냈어요. 이것저것 남들이 안하는 활동을 많이 하니까 전국의 산 관련된 상은 다 받았죠.
무등산에 가면 철쭉제에서, 대구 가면 팔공산제, 부산 가면 금정산제에서 고맙다고 상을 줬어요. 저기에 있는 건 빙산의 일각이에요."
선생이 각종 상패와 트로피가 진열된 선반을 가리켰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상패 위에는 먼지와 함께 지난날 그가 흘린 피와 땀이 내려앉아 있는 듯 했다.
↑ 1960년 서울산악회가 주축이 돼 건설한 백운산장은 지금까지 산악인들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목재하나, 시멘트 한 포대까지 모두 산악인들의 힘으로 나른 것이다.
서울산악회 발족 당시, 그는 결혼도 한 몸이었지만 행실은 총각 때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이 양반은 산이 제일이지, 식구는 상관도 안했어요. 신혼 때인데도 토요일 아침이면 산에 가서 일요일 밤 늦게야 집에 들어왔으니까요.
산악회 만든 뒤에는 그 뒤를 돌보느라 아예 가족은 돌보지도 않았지 뭐에요."
그때 일을 떠올리며 부인 김점순 여사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서 저녁을 한 번도 같이 못 먹는 지경에다, 선생의 모친은 '산귀신 붙었다'며 굿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
당시 서울에서 북한산 이나 도봉산을 가려면 버스종점인 돈암동 에서부터 반나절 이상을 꼬박 걸어야 했다.
백운산장 에 도착하면 새벽 1시쯤. 깔딱고개에서 '야호'하고 신호를 보내면 백운산장 에서는 불을 때 밥을 짓기 시작했고,
산장에 도착해 미군용 씨레이션(C-ration)으로 찌개를 끓여 함께 먹으면 시간이 딱 맞았다.
그렇게 밥을 먹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 새벽에 일어나 인수 후면이나 백운대 정면을 등반한 후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나서 오전 등반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갈때도 만경대 리지를 경유해 정릉으로 하산하니, 자연 귀가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인수봉을 등반하고 내려갈 때도 만경대나 표범바위 등 무조건 암벽 기술을 써먹을 수 있는 데로 내려갔어요. 요즘은 리지 강습회 라는게 따로 있다던데,
암벽만 제대로 배운다면 리지는 저절로 되는 거거든요. 결국 본인의 능력 여하에 따라 즐길 수 있는 폭이 다른 거죠."
도봉산에 갈 때는, 밤에 천축사에 닿으면 법당 앞에서 절을 한 뒤 절간 한 칸을 빌어 잠을 청했다.
당시에는 으레 절에서 자는 걸로 알고 다녀 천막(텐트)도 안 가지고 다녔지만, 절에서 쫓겨나는 법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음날 나올 때 다시 법당에서 절하고 불전함에 시주하면 그게 곧 숙박비 대신이었다.
그 시절은 매주 산행이 재미있고 스릴 넘쳤으며, 순간순간이 소중하고 즐거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초창기 한국산악회의 독선적인 운영에 대한 반발과 보다 폭넓은 산악운동에 대한 열의로 창립됐던 서울산악회는 1962년 대한산악연맹이 발족하는데 구심적인 역할을 했다.
안광옥 선생 또한 이 일에 적극 참여해 1960년 9월부터 대한산악연맹 창립을 위한 회합의 책임간사로 일하다가, 1962년 4월 연맹 발족 후 초대 이사를 역임 하기도 했다.
서울산악회는 1980년에 대산련에 가입했으며, 이때부터 동명 산악회와의 명칭 문제 때문에 '한국 서울산악회'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서울산악회에서는 산악운동의 질적 향상을 위해 1963년부터 설악산악회와 공동으로 설악산 권금성 일대에서 하계 산간학교를 개최하고,
1971년부터는 산악문화사와 조선일보사 그리고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산악회였던 신우회(信友會)의 후원을 받아 겨울등산학교를 운영했다.
그중 특히 겨울등산학교는 주위로부터 "내용이나 체제에 있어 알차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그래서 1974년 4회째 교육이 끝난 뒤에는 안광옥, 권효섭씨 등이 주도해 산악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대상으로 하는 상설 등산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공식명칭을 '한국등산학교'로 변경하게 된다.
"당시 산악계에서 한국등산학교의 권위가 상당 했어요. 국내 에베레스트 초등자인 고상돈씨도 산에 갓 입문했을 당시 한국등산학교에 입문해 교육을 받았었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한국등산학교의 교육은 엄격했다.
매일 새벽이면 전 강사들과 교육생들이 구보를 해야 했고, 교육 중에는 누구도 담배를 피우지 못했으며,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행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선생은 특히 모범을 보여야 하는 강사들에게 더욱 단호한 기준을 제시하며 "자신이 가진 지식과 기술을 아낌없이 베풀라"고 충고했다.
권위와 신임은 공으로 얻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차츰 후원금이 줄어 운영에 난항을 겪게 되었고,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등산학교는 권효섭 교장이 서울시산악연맹회장을 역임하며
서울시연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동문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선생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등산학교에서 손을 떼며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다.
들인 공과 열정에 비해 너무나 허무한 결말이라, 당시를 회고하는 그의 말에는 아직도 진한 아쉬움이 배어있었다.
"그래도 여직꺼정 정월 초하루에 후배들이 세배하러 오는 걸 보면 그이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은 것 같아요."
한참을 말이 없던 선생을 대신해 사모님이 옆에서 거들었다.
가정의 대소사는 모두 부인에게 미루고 평생을 산에만 다녔던 남편에게 섭섭함도 없지 않았겠지만, 누구보다 가까이서 그를 지켜본 부인의 눈에도,
산에 대한 열정은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두말할 필요가 있으랴. 70년이 넘도록 산에만 다녔지만 "아직도 산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선생에게, 산은 말 그대로 '고향'이나 진배없다.
↑ 1960년대 중반 만경대 리지를 등반 중인 안광옥 선생. 인수봉이나 백운대를 등반하고 하산 길에도 늘 만경대 리지를 따라 내려가곤 했다.
"나의 등산 인생은 평생 전성기였다"
안광옥 선생은 1920년대 당시 경기도 양주 관할이던 우이동에서 출생했다. 아직도 그곳엔 일가붙이들이 많이 산다.
백운대와 인수봉을 밥 먹듯이 다녔지만, 그는 항상 한밤중에 우이동을 지나다녔다.
집안 사람들 사이에 "죽으려고 독바위(예전엔 인수봉을 그렇게 불렀다) 올라 다닌다"고 소문이 나 피해 다니느라 그랬다.
원래 키도 크고 체력이 좋았지만, 한국전쟁 이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주한미군 시청각 심리국에서 <자유의 벗>이라는 잡지의 사진기자로 일한 것이,
당시 전국의 산을 돌아다닐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끝없는 그의 열정도 한몫했다.
↑ 결혼하고 곧 해방이 되었다니, 부부는 70여 년을 함께 살아오며 얼마나 많은 산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김점순 여사는 남편을 ‘아버지’라 불렀다
.
"그때 내 목표가 지리산 천왕봉을 100번 올라가는 거였어요. 그래서 토요일이면 야간열차를 타고 진주로 가서 새벽 첫 버스로 중산리로 갔죠.
그렇게 천왕봉을 오르고 세석을 거쳐 쌍계사로 내려오면 꼬박 하루가 걸려요. 그럼 다시 밤차로 서울에 올라와 월요일에 바로 출근하고. 그땐 정말 힘과 열정이 넘쳐났어요."
"암벽은 원래 40살까지만 하고 그만할 생각이었어요. 근데 재미가 있어서 하다보니까 50까지 하고, 그러다보니 70먹을 때까지 인수봉을 올라 다녔어요.
돌아보면 내 산 인생은 평생이 전성기였던 것 같아요."
지난 2011년에도 미수(米壽)를 기념해 인수봉을 등반할 정도로 그의 등반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그렇게 원 없이 다니고도 아쉬움은 남는다.
산악회 안내등산을 도맡아 하느라 천왕봉을 등반을 100번 다 채우지 못한 게 그렇고, 외국도 일본 북알프스나 구라파(유럽)는 가봤어도 네팔의 봉우리는 못 올라본 게 그렇다.
산을 향한 심장은 아직 한창 때 그대로인데, 이제는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했다.
"작년까지도 등산을 했는데 이제는 다리도 아프고 숨이 차 걷는 게 힘들어요. 그래서 자전거로 운동하고 아침마다 운동장에 나가 걷는 게 다에요.
그것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년설은 만년설 이기에 쉽게 녹지 않는다.
그것이 계절에 따라 쉽게 녹고 쌓이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면 알피니스트라는 말이 지니는 무게는 다를 것이다.
그곳을 오르는 꿈을 현실로 살아내고자 하는 망백(望白). 망백(望百)의 알피니스트에게도 마찬가지다.
●열정은 평생 사그라 지지않고, 그래서 늘 살아있는 전설 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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