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조선 최초 전문산악인 정란(鄭瀾)
安大會(영남대 한문교육학과 조교수) ●산에 오름은 배움길 과 같아서 큰 고생 뒤엔 반드시 큰 즐거움 있다.!
오직 하늘만 오르지 못할 뿐 나머지 땅은 내 발이 밟으리라. (이용휴의 '백두산을 찾아가고 그 김에 동방 명산을 두루 여행하는 정란을 배웅하며' 중 제7수다). 익숙한 일상 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 과 호흡 하기만 해도 현대인은 행복감 을 느낀다. 가까운 자연 을 벗어나 더 먼 나라, 더 광대한 대륙 을 밟는 낯선 세계 에 대한 여행 이라면 더구나 일상으로 부터의 탈주일 뿐 아니라 한 개인 의 인식 과 존재 에 큰 변화 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창한 여행 에 나서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교통 이 발달 하지 않은 수세기 전 여행 이란 비용 이나 시간, 노력 에서 말할 수 없는 투자 를 요구했다.
*그렇기에 먼 옛날 탐험가 혹은 여행가 의 역할 은 남다른 의미 가 있다. 대륙을 넘어 다른 문명세계 를 넘나든 마테오 리치, 이븐 바투타, 함대 를 이끌고 동남아와 아프리카, 심지어 아메리카까지 항해 한 정화(鄭和), 중국 대륙 구석구석을 뒤진 서하객(徐霞客), 그리고 신라시대 승려 혜초의 행적 을 보면 여행 의 참의미 를 느낄 수 있다. 조선 후기 에는 사대부들 사이 에 금강산 열풍 이 불었고 많은 이들이 명산 을 탐방 하는 멋을 즐겼다.
특히 18세기 이후 문인들은 남다른 여행 체험을 시와 산문 으로 남겼다. 그중 운이 좋은 사람들은 중국 이나 일본 을 여행 하는 행운 을 얻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여행 은 일상을 벗어나 잠시 즐긴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과연 그 시대에 여행 그 자체 에 생의 의미 를 둔 전문 여행가가 존재 할 수 있었을까. 고전 공부 에 열중한 청년기 에 고전 을 들추다 보면 시대 를 앞서가는 특이한 사람, 한둘쯤 은 꼭 마주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여행 그 자체를 목적 으로 명산대천을 누빈 전문 여행가도 분명히 있었다. 오늘날의 여행가 라는 개념 에 꼭 맞는다고 할 수는 없어도 여행 에 대한 열정 이라든가 발로 걷고 당나귀 를 타는 등 ,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 에 다다르는 여행가 의 참 모습 을 보여주는 사람 말이다.
*18세기 후반 창해일사(滄海逸士)란 호를 사용한 정란(鄭瀾ㆍ1725∼1791년)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정란은 그저 여행이 좋아서 조선 천지를 발로 누볐다. 종(縱)으로는 백두산 에서 한라산 까지, 횡(橫)으로는 대동강 에서 금강산 까지 자신 의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천생 여행가였던 것. 그는 자신이 체험 한 내용 을 글과 그림 으로 남겼다.
정란은 경상도 군위 사람 으로 동래 정씨 명문가 출신 이었다.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지낸 정광보(鄭光輔ㆍ1457∼1524년)의 10대손으로, 정씨 가문은 현종(顯宗) 때 , 대사간 과 예조참판 을 지낸 정지호(鄭之虎ㆍ1605∼1678년) 때까지 명문가 로 이름 을 떨쳤다.
●그런 경상도 출신 사대부 가 전 국토를 샅샅이 뒤지는 여행가가 된 계기 는 무엇일까. 정란도 처음 에는 다른 사대부 들 처럼 경서 와 문학 공부 에 전념 했다. 스승은 당시 경상도가 배출 한 최고의 문사 신유한(申維翰ㆍ1681∼1752년)이었다. 서얼 에다가 경상도 출신 인 신유한은 문과에 장원급제 하여 세상 을 놀라게 한 수재 중의 수재 였다. 조선 후기에 서얼이 문과 에 장원 급제 한 일도 없었을 뿐더러 더구나 경상도 출신 이 그러한 영광 을 누린 예도 없다.
신유한은 신분적, 지역적 한계 를 극복하고 문과에 장원급제 함 으로써 살아 있는 전설 이 됐다. 정란은 20대를 전후한 시기에 말을 빌려 타고 금오산 에서 200리나 되는 길을 달려 가야산 밑에 머물고 있는 신유한 을 찾아갔다. 신유한이 정란 에게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묻자 정란 의 대답은 이랬다.
'제가 세간 에서 이롭다고 하는 것과 하고 싶은 온갖 것을 살펴 보았지만, 한 가지도 좋아 할 것이 없고 좋아 하는 것은 오로지 옛 사람 의 문장 입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공부 했으나 장성 해서도 알 수 없으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문수보살 에게 내 병통 을 묻고, 유마힐거사 에게 설법 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신유한은 정란의 문수보살이나 유마힐 거사가 되기를 거부했다.
고문(古文)이 시서(詩書)보다 더 높다고 생각 하지만 온갖 세상 사람들이 고슴도치 처럼 가시 를 세우고 분분히 모여드니 그들에게 가서 배우는 것이 낫겠다고 정중히 거절 했던것, 정란 은 발끈 했으나 이내 다시 학문 의 길로 인도 해 달라고 졸랐다. 그제야 신유한은 이 당돌하고 기백 넘치는 젊은이에게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공부하라는 뜻을 담아 ' 정란 에게 주는 글(贈鄭幼觀瀾序)'을 써준다. 이 글은 신유한의 문집 '청천집(靑泉集)'에 실려 있다. 한동안 정란은 신유한의 문인(門人)으로 창작 에 몰두했다.
*나이 서른에 접어든 정란은 공부 를 접고 여행 을 떠났다. 경전을 공부 하고 문장 을 익히는 사대부의 길 대신 여행 이란 험난한 길을 선택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잠시 현실 을 벗어나 산수 와 자연 을 탐방 하는 일은 누구 에게나 권장 할 일이지만, 여행 자체 를 즐겨 전문적 으로 여행 하는 것은 일종 의 현실도피 로 여겨졌다.
더구나 조선시대 선비 에게 있어 이러한 현실방기 는 절대적 금기의 하나였다. 그래서 여행에 몰두한 선비 들은 대부분 현실 사회에 적응 하지 못하고 이탈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정란의 경우는 좀 다르다. 그는 현실 도피적 이었다기 보다는 여행 그 자체가 주는 새로운 세계 와의 만남 을 동경했다.
그는 낯선 세계에 대한 모험의 욕망으로 끓어 넘쳤다. 우선 정란의 성격이 그랬다. 정란 은 성품이 오만하여 남들 앞에서 다리를 쭉 뻗고 앉기를 잘했다. 세상이 정한 예법 에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는 그에게 온갖 제한으로 사람을 옭아매는 조선의 현실 이 성에 찰리 없다.
자연스럽게 그는 출세 를 위한 과거시험 에 연연해 하지 않았다. 남경희(南景曦ㆍ1748∼1812년)는 '정창해전(鄭滄海傳)'에서 이렇게 증언하였다.
선생은 생김새가 깡마르고 기이하여 보통 사람 과 달랐다. 성품은 뻣뻣하고 오만 하였으며 다리 를 쭉 펴고 앉기를 좋아하는 등 예법에 구애 되지 않았다. 문예 에 일찍 숙달 하였으나 머리 를 굽혀 과거 공부 를 하려 하지는 않았다. 약관 나이에 청천 신유한 의 문하 에서 배워 문장 의 큰 취지 를 배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탄식하며 '대장부가 해동 에서 태어나 비록 사마천 처럼 천하 를 유람 하지는 못할지라도, 해동의 명산대천 을 두루 본다면 그것 만으로도 족하다'며 노새 한 마리를 장만 하여 홀연히 혼자 길을 떠났다.》
청노새를 묻고 난 뒤 정란이 남경희 에게 부탁 하여 지은 시다. 보통 의 말이 화려한 재갈 과 안장 으로 치장 하고 도회지 를 다니는 반면, 이 청노새 는 세속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오골을 태우고 산수를 다니는 천성 의 소유자요, 주인 의 산수벽 을 이해 하는 존재로 묘사 했다.
남경희는 청노새 가 몸을 뒤집어 그림 속에 들어가 그 긴 얼굴이 살아 있는 듯이 느껴지므로 정란 에게 그림 속, 청노새와 함께 다시 산길을 따라 여행 을 하라고 시를 맺었다. 정란은 전국 을 떠돈 여행가지만 본래 시와 문장 에 능한 문인 이었다. 세상 을 주유 하며 시와 글을 지어 소지한 해낭(奚囊)에 넣었다.
산의 풍치를 묘사 하거나 그림 을 그려 산맥 과 수맥을 표시한 '유산기(遊山記)'도 그 해낭 에 들어 있었다. 그는 여행 의 의미 를 예술적 으로 담는 일에도 주목 하여 각지 에서 산수유기 를 썼고, 화가 와 문장가 들로부터 ,자신 의 산행 을 묘사한 그림 과 글씨 를 받았다.
●이 서첩 이 '불후첩(不朽帖)'이다. 정란은 자신의 여행 체험을 후세에 전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서첩 을 엮으면서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후첩'이라는 이름 을 단다. 그는 이 화첩 을 당대 의 명사인 채제공과 성대중(成大中) 등에게 보이고 글 을 받았다. 채제공은 정란 에게 '당신 이란 사람 자체가 썩어서 사라지지 않을 존재'라고 하며 그림 이나 찬사 가 따로 필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란 은 예술적 심성의 소유자 였다. 화가 김홍도와 맺은 인연은 특별하다. 김홍도 그림 가운데 대표작인 '단원도'는 사실 정란 을 위해 그린 것이다.
이 그림 상단 에는 정란 이 쓴 2편의 시 와 김홍도가 그림 을 그리게 된 사연 을 적은 제사(題辭)가 실려 있다. 정란은 1780년 묘향산 을 거쳐 의주 로 해서 백두산 정상에 오르고 금강산을 거쳐 돌아온 뒤 서울 김홍도 의 집을 방문했다. 그때가 신축년(1781년)이었다. 아마 백두산 을 유람한 행적 을 김홍도 에게 전해주고 그림을 부탁 하기 위해서 찾아간 듯하다. 그 자리에 화가 강희언(姜熙彦)도 함께 했다.
여기서 정란은 필시 그 귀한 백두산 여행담 을 재미있게 늘어 놓았던 모양이다. 나이가 가장 많은 정란이 좌장 의 위치 를 점하고 김홍도는 거문고 를 연주 하고 강희언은 술을 권했다. 한시대 명사 3명이 둘러앉아 즐겁고 진솔한 시간을 보내고, 이를 진솔회(眞率會)라 불렀다.
그로부터 약 4년이 지난 1784년 12월 경상도 안기역의 찰방(察訪.요즘의 역장)으로 재직하던 김홍도를 정란 이 또 찾았다. 정란은 '얼굴 과 용모 에는 여전히 산수의 구름 기상이 서려 있고 그 정력은 늙었는데도 불구 하고 쇠하지 않은 모습 으로 다음해 봄 한라산을 등반 하겠다며 의욕 을 불태웠다.
김홍도는 그의 여행욕에 대해 '대단히 기이하고 웅장 하다'고 경탄 하면서 그와 '닷새 낮밤 으로 취하면서 , 회포 를 푼 후' 4년 전 모임 을 추억하기 위해 그림 을 그려주었다.
그림을 보면 단원 의 멋들어진 정원 초가집 마루에 거문고 를 뜯는 이가 김홍도 이고, 그 옆에 부채 를 부치는 이가 강희언 이며 앞쪽으로 긴 수염에 늙수그레한 이가 정란이다.
버드나무 휘늘어진 열려진 대문 앞에 벙거지를 쓴 채 쪼그리고 앉아 졸고 있는 아이가 , 정란 을 따라 다니는 종이고 그 옆에 비쩍 마른 청노새 가 보인다.
당대 최고 의 화가가 그린 명작 속에 당대 최고의 여행가 정란 이 우연치 않게 등장 하고 있다. 화가와 여행가 는 세상 을 오시하는 오골(傲骨)의 자태 와 누가 뭐라든 열정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면에서 통하는 데가 있었다.
서른 살부터 20여 년간 조선팔도 를 구석구석 탐방 했지만 백두산 과 한라산은 미답의 세계로 남아 있었다. 쉰다섯 되던 해 정란 은 백두산과 한라산 등반 계획을 세웠다.
●18세기 이전 까지 만 해도 백두산 에 대한 정보 는 거의 없었다. 백두산이 탐험 의 대상 이 된 것은 18세기 이후 로 이의철, 홍계희, 박종, 김진상, 서명응, 조엄, 신광하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만이 당시에 백두산 을 등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이 그 지역 관료 로서 부임 했거나, 귀양 을 간 김에 백두산에 올랐고, 신광하 처럼 친지가 그 지역 의 , 벼슬아치가 된 기회 를 이용해 10여 명에 이르는 부대 를 이끌고 등반 하기도 했다.
●당시 백두산은 오지 중의 오지 로 등산이 아니라 탐험 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개인 의 의욕 만으로는 오를 수 없는 산 이었던 것이다. 백두산 과 한라산 등반 은 여행가 로서 그의 삶을 완성 하는 목표 였다. 다음은 쉰다섯 살의 정란이 열두 살짜리 강이천에게 자신의 계획 과 의욕 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 늙은이가 서른 이 되어 청노새 한 마리, 아이종 하나, 보따리 하나, 이불 한 채를 가지고 남으로는, 낙동강을 노닐고, 덕유산을 오르고 속리산을 더듬고 월출산 에 오르고 지리산을 엿보았고, 서로는 대동강을 굽어보고 동으로는 태백산과 소백산을 구경하고 단발령을 넘어 두 번 금강산에 들어가서 , 바닷가를 따라 돌아왔지. 오직 북쪽 백두산과 남쪽의 한라산 에는 아직도 창해옹의 발자국이 없단 말씀이야. 하지만 나는 아직 힘이 있어.》 정란은 세속적 성공에 관심 이 없었고 주어진 틀에 안착 하여 살기 를 거부했다. 대신 여행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당시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새로운 인생 이었다. 서른의 나이에 그는 과감히 여행길에 올랐다.
《사람들은 제 둥지 만 돌아보는 새와 같이 / 떠나려다 가도 다시 망설이며 빙빙 돌건만 / 그대는 절세(絶世)의 용맹함 지녀서 / 단칼에 세상에 묶인 그물 끊고 벗어났네.》 정란을 가장 잘 이해한 문인 이용휴 가 백두산 으로 떠나는 정란 을 배웅 하며 써준 시의 일부다 부귀 와 공명 을 위해 주어진 인생을 꾸려가는 것이 조선조 선비 의 길이었지만 정란의 인생 목표 는 달랐다. 그래서 단칼에 세상에 묶인 그물 을 끊을 수 있었다.
정란 에게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채제공(蔡濟恭)은 여행 에 몰두 한 정란 을 두고 ' 천하 만물 어떠한 것도, 그의 즐거움 과 바꿀 수 없다'고 부러워했다. 여행의 즐거움! 그것이 처자 를 버리고, 벼슬 도 버린채 전국을 주유(周遊)한 동기였다. 정란 의 친구 강식준(姜式儁)은 정란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사람은 숭상 하는 것이 같지 않고 제각각 자기 취미 를 완성 할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창해 를 이해 하지 못하지만 ,창해 역시 세상 사람 이 이해 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창해 에 대해 나혼자만이 아는 사실이 있으니, 창해는 세상 일을 버리고 산수 를 즐기는 고질병이 깊다. 대자연의 원기 를 호흡 하며 세상 밖을 자유로이 노니는 것이야말로 천하의 즐거움 이라 여겨 그 무엇과도, 바꾸려 하지 않았고, 늙어서도 지치지 않았다. 명예나 재물을 추구 하여 영화로움 과 쇠잔함, 얻음 과 잃음 에 마음 을 쓰는 세인들과 는 만만 배나 다르다. 육체 조차 누가 된다고 여기는 창해 이니 그밖의 것이야 또 말해 무엇 하랴. (소은선생문집 권2 '증창해정유관란서 : 贈滄海鄭幼觀瀾序')》
그랬다. 정란은 대자연 과 함께 호흡 하는 것을 최상의 즐거움 이라 여기며, 평범 하고 구태의연 한 일상 의 유혹 에 지지 않았다. 정란은 산수에 고질병이 너무 깊고, 여행 이 즐겁기 때문에 그 길을 갔을 뿐이다. 그는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의미 있는 삶 을 살고자 한 것이다.
여기서 다시 의문 이 생긴다. 그는 왜 공부 를 포기 한 것일까. 정란이 여행 에 뜻을 둔 사실을 눈치채고 , 그의 친구 신국빈(申國賓ㆍ1724∼1799년)이 다음 과 같은 충고 를 적은 서찰 을 보냈다.
《그대가 송(宋) 이하의 책은 보기 를 즐겨하지 않고 그저 양한(兩漢)시대 문장 만 읽고 사마천이 , 천하 를 장쾌하게 노닌 일을 사모하여 '천지의 큼과 조화의 무궁함은 그저 책을 읽어서 얻을 수 없다'고 하며 , 산천을 노닐어 온갖 변화 와 괴상한 구경거리 를 마음껏하여 심장과 눈을 웅장 하게 하려고 하였소. 그대는 참으로 주자(朱子)가 바다처럼 넓고 하늘처럼 높으며 끝을 알 수 없이 유구한, 공적을 이 방문 안에서 이루었음을 모르오. 그대의 의지는 참으로 웅장 하다고 하겠으나 그 학문 은 잘못되었소. 대저 학문 이란 그 근본 을 고요함에 두고 , 천지에 참여 하여 교화 를 촉진시켜 만물을 기르는 것이니 이 고요함 을 버리고서 무엇에 근본 을 두겠소? (태을암문집 권4 '여정창해유관란 : 與鄭滄海幼觀瀾')》
신국빈은 당시 경상도 출신 학자들 과 마찬 가지로 주자학을 학문의 근본으 로 알았기에 정란의 여행벽이 못마땅했다. 비판의 핵심은 학문의 근간 을 주자학에 두지 않고 , 문장공부 한답시고 여행 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주자학은 학문의 근본 을 정(靜)에 두었다. 그러므로 대자연을 직접 발로 밟지 않고 방 안에 앉아서 , 침잠 하여 성찰해도 대자연의 비밀 과 진리 를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신국빈의 말 가운데 주자 의 위대한 학문이 이 방문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바로 그 의미다.
그런데 정란은 천하를 여행 하여 직접 대자연을 호흡 함으로써 온갖 변화 를 목도 하고, 괴상한 구경거리 를 함으로써 오히려, 순수하지 못한 사악한 것에 물들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여행의 동(動)으로 인한 폐단 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란 의 여행 목적 가운데 하나가 인간 의 포부 를 키우고 경험 을 풍부하게 하여 , 창작에 도움 을 얻으려는 것이고, 그 모범이 사마천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는 천하 를 두루 유람한 여행 체험 에서 나왔고 정란 이 여행에 발을 들여놓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 여긴 신국빈은 그에게 유학의 길로 돌아오라고 간절히 권유한 것이다.
이러한 신국빈의 판단이 틀린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란의 여행 에 대한 몰두 를 창작 을 향한 동기 로 돌린 것은, 고정관념을 벗지 못한 좁은 소견이다. 정란은 주자학이 아니라 더 큰 세상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집을 나선 창해가 동반 한 것은 청노새 한 마리, 어린 종 한 명, 보따리 하나, 이불 한채였다. 그 무렵 명산 열풍이 불어 금강산에 오르지 않은 것은 식자층의 수치였다.
하지만 그들의 등산은 호사롭고 떠들썩하기 그지없었다. 친구를 불러 모으고, 때로는 기생과 악공까지 대동하며 , 말을 타거나 오르기가 힘들면 중을 동원해 남여(뚜껑 없는 가마)를 타고 산을 올랐다.
그러나 정란은 단출한 여장으로 고독하게 자연과 대면했다. 이렇게 해서 금강산 비로봉을 네 번이나 올랐다.
일생일대의 목표 였던 백두산을 등반 하기 전에 두 번, 백두산을 등정 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번, 마지막으로 1788년 강세황ㆍ김홍도ㆍ김응환을 비롯한 사람들과 함께 오른 일이 확인된다. 9월14일 강세황이 장안사 에 묵고 있을 때 어디선가 정란 이 표연히 나타난 일이 있다.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정란은 금강산을 여행 하는 자신 의 모습을 화가들에게 그려달라고 해서 '산행도(山行圖)'를 만들었다. 남경희는 '정창해전'에서 '그는 특히 금강산을 좋아하여 발길이 네 번이나 비로봉 정상에 이르렀는데 그림을 그려 감상 자료로 삼았다. 그림은 최북(崔北)이 그렸고, 찬(贊)은 혜환(이용휴)이 지었으며, 글씨는 표암(강세황)이 썼으니,이 셋을 삼절(三絶)이라 ,일렀다'라고 했다.
다음은 남경희가 말하는 이용휴의 찬(贊)으로 추측되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이 산에 다녀갔다 해도 오히려 공산(空山)이었지. 오늘 금강산이 그대를 만나자 모든 바위 와 골짜기가 반가운 얼굴을 하는구나! 그대 두고 산문(山門)을 처음 연 분이라 해도 좋겠구나!
이 화첩 에는 정란이 앉았거나 선 모습 과 길을 걷거나 청노새 를 타고 홀로 가는 모습 외로운 배에 홀로 기대 있는 모습, 지팡이 를 짚고 먼 데를 가리키는 모습 갓을 벗고 두 다리 쭉 뻗고 있는 모습 등등 갖가지 자세가 묘사되어 있다.
이평에 따르면 정란은 금강산의 진면목 을 제대로 이해한 최초 의 사람이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이 금강산 을 다녀 갔지만 그저 다녀만 갔을 뿐 , 산의 비경 을 발견 해내지 못했고 금강산 과 감정 을 나누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란이 금강산에 오르자 모든 바위 와 골짜기가 반가운 얼굴을 한다고 했다. 과장 이기는 하지만 그의 탐방이 금강산 바위 하나하나 골짜기 곳곳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는 것이다. 금강산의 첫 문을 연 사람 그가 바로 정란 이라는 것이다.
남경희의 '정창해전'에는 정란이 전국을 여행 할 때 타고 다닌 청노새 이야기 가 등장한다. 이 충직한 청노새는 주인 을 태우고 금강산을 오르고 관동팔경을 두루 구경하며 내려오다 그만 삼척 땅에서 병들어 죽었다. 정란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묻고 제문 을 지어 애도했다. 그 제문은 처절하여 읽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청노새가 죽어 묻힌 곳을 청려동(靑驢洞)이라 불렀다. 그의 쓸쓸하고 지루한 여행길을 함께 한 것은 동료 양반 이나 시인 묵객이 아니라 청노새 와 종 한명이었다. 건장한 말이 아닌 야윈 청노새를 타고 다녔다는 사실에서 그의 여행의 멋을 짐작할 수 있다. 서둘러 목적 한 장소로 이동하지 않고 타박타박 먼 길을 걷는 세 개의 그림자가 눈에 선하다.
●자동차로 순식간에 산 바로 밑, 절 코앞까지 들이닥치는 오늘날 여행객의 행태와는 큰 차이가 있다. 청노새는 김홍도가 그린 '단원도(檀園圖)'에도 등장한다 남경희는 '정창해의 청노새를 위한 노래'를 지어 분신과 같은 청노새를 잃고 시름에 잠긴 정란을 달랬다.
《창해 선생은 기이함을 좋아하는 분타는 것은 청노새로 말이 아니라네. 그저 맹호연(孟浩然)이나 진도남(陳圖南) 같은 오골(傲骨)들이높다랗게 앉아 어깨를 추스르고 타게 허락하지.선생이 이를 얻어 산수를 노닐어
물론 쉰다섯 살 노인에게 백두산 과 한라산을 오르는 일이 생각 만큼 쉬울 리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 힘이 있어'라는 말이 더욱 비장하게 들린다.
정란은 등반에 앞서 이용휴와 신경준 등 명사 들을 두루 방문 하여, 여행 계획 을 비추며 격려 의 글 을 받아냈다.
이용휴 는 다음 시를 써서 그의 등반 성공 을 축원했다. 오래도록 백두산 좋다는 말 들어흉중에는 백두산 고질병이 붙었거니가다가 하늘 끝에 흰 눈이 보이거든우선 술잔 들어 환희를 표하시게.
정란은 18세기 호남이 배출 한 3대 천재 중 하나라는 신경준을 찾아가 '나는 곧 관서 땅으로 가서 왕검성에 이르러 토산(兎山)과 정전제 를 구경하고 태백산 에 들어가 단군대 를 방문하고 개마고원을 넘어서 불함산(不咸山)에 오를 것이오. 그리하여 이국(二國) 산천을 내려다본 다음에 남쪽 으로 내려 와 지달산 과 설악산 을 노닐고서, 돌아올 것이오'라 말한다. 그 말을 한 지 이태 뒤인 1780년 전후한 시기에 정란은 등반을 감행했다.
그의 백두산 유람은 거의 1년 정도 걸린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백두산에서 돌아와 사람들에게 신기한 견문 을 전달했다. 강이천에게는 도중에 고생한 일, 유람하며 본 일, 산과 계곡 의 기이함, 구름 과 초목의 온갖 모습 을 밤새도록 말해주었다.
화가 최북 에게는 자신이 본 것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고 이를 친구 신국빈 에게 보여주었다. 정란 보다 조금 늦게 1784년 백두산 여행을 다녀온 신광하 는 호까지도 백택(白澤)으로 바꿀 만큼, 당대인 들에게 백두산 체험 은 충격적 이었다.
백두산 천지(옛날에는 대택<大澤>이라 불렀다)를 구경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다. 정란은 친구 에게 '백두산 정상 에 올랐더니 천하만사 가 까마득히 저절로 잊혀졌소. 세상 의 이른바 부귀빈천, 사생 과 애환이 하나도 내 가슴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제왕 과 영웅호걸의 업적 이란 것도 그저 미미한 것에 불과 하더이다'라고 그 충격 을 전해주었다. 한편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서 정란 은 이제 한라산만 남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용휴가 이렇게 만류 하는 글을 써주었다.
《정일사가 역내(域內)의 많은 승경지 를 두루 노닐고서도 오히려 역외(域外)의 명산 을 보지 못했다고 한스럽게 여겼다. 나는 일사에게 일렀다. '비유 하자면, 절세미인을 사모하는 자가 한번 미인을 보게 되면 마음 이 바로 심드렁 해지는,것과 같네. 차라리 오랜 세월 마음 에 놓아두고 혹여라도 한번 만나기를 기다리는 게 낫지 않겠소. '(이용휴 '정일사 의 백두산 유람기의 뒤에 쓰다')》
이용휴가 절세미인은 직접 보는 것보다 보지 않고 그리워만 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말로 정란을 달래는 품이 재미있다. 또 이용휴는 명산 하나쯤은 오르지 말고 남겨 두라는 말도 건넨다. 그만큼 한라산에 오르겠다는 정란의 의지가 강했음을 알 수 있다. ![]()
당장 이라도 떠날 듯한 기세 였지만 정란 이 한라산 과 조우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김홍도 와 만난 1784년, 새봄이 되면 한라산을 오르겠노라고 한 것을 보면 1785년 봄에, 한라산 등반에 성공한 듯하다.
정란은 만년에 서울에 들러 성대중을 찾아가 '불후첩'을 내어놓고 글을 받으려 했다. 성대중은 한 가지 삽화 를 들어 정란이 불후(不朽)의 이름을 남길 것을 예언했다.
《창해옹이 일찍이 내 집을 찾았는데 손님 가운데 옛일에 해박한 사람이 있어 , 그를 보고 내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자네는 이마두(利馬竇ㆍ마테오 리치)를 본 적이 있는가? 저 노인 이 그와 흡사하네그려!' 그 손님 은 한번도 창해옹 을 본 적이 없었지만 창해 를 이마두 에 비교했다.
창해옹은 그 말을 흔쾌히 여기고 좋아했다. 이마두라면 천하를 두루 구경했고, 창해옹은 동국(東國)을 두루 구경했다. 크고 작음에서 비록 차이가 있으나 두루 구경 한 점은 같다. 그들의 모습 이 비슷한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여행가의 삶은 고단했다. 서른 이후 정란이 본격적인 여행 에 빠지면서 모든 세속적 성공 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 까지도 거의 버린 듯하다.
채제공은 화첩 을 들고 찾아온 정란을 평하여 '처자식을 버리고 명산대천 여행을 좋아 한다'고 평했다. 가정에 무책임한 정란을 대신한 사람은 외아들 정기동(鄭箕東ㆍ1758∼1775년)이었다.
아들의 자는 동야(東野), 호는 만취(晩翠)이나 갓 결혼한 18세에 요절했다. 그리 젊어서 죽었으니 기록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다만 이용휴가 쓴 묘지명에 '슬프다! 산길에 사람의 발길 끊어지고 숲에 걸린 해가 저물어갈 때면 문에 기대어 ,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 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라고 씌어 있다.
정란은 아들이 죽은 후 1778년 서울 로 가서 이용휴 와 신경준에게 아들 묘지명과 묘갈명 을 부탁했다. 이용휴는 '포의정군묘지명(布衣鄭君墓誌銘)'을, 신경준은 '정동야묘갈명(鄭東野墓碣銘)'을 각각 지어주었다.
이용휴의 글을 읽어보자. 《남다른 덕을 지녔음에도 오래 살지 못하는 사람 이 존재하는 까닭 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남다른 덕을 행하는 사람 은 보통의 사람들이 모범 으로 삼아야 할 대상 이기에 하늘이 그를 , 세상에 내려 보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끔 한다. (…중략…)
정군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을 갖추었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모님이 원하기도 전에 실천했고, 말씀을 하면 메아리처럼 바로 반응했다. 이 일 저 일 모두 봉양하여 부모가 계신 줄만 알 뿐 자기 자신 도 있다는 사실 을 몰랐다. 그밖의 일은 좋아하는 것이 없었으나 오직 책을 좋아하여 남들이 식욕 과 색욕에 대해서 탐하듯 하였다. 죽기 전에 효도 를 다하지 못한 일과 책을 다 읽지 못한 일을 한스럽게 생각하여 임종 을 앞두고서 그 아내인 조씨(趙氏)에게 시부모 를 잘 모실 것과 책을 무덤 에 함께 묻어줄 것을 당부하였다.
아내가 흔쾌히 허락하고 그대로 실천하였다. 명(銘)을 짓는다. 눈을 한번 감고 나면 온갖 욕망 이 사라져 만사가 끝이다.
그대는 부인 으로 자식을 삼고 서책으로 순장을 해서 평소 의 뜻을 이었구나!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고 경전 에 일렀고, 군자의 마음은 죽어도 그치지 않는다고 선유(先儒)가 말하더니 바로 그대를 두고 한 말이다.
슬프다! 산길에 사람의 발길 끊어지고 숲에 걸린 해가 저물어갈 때면 문에 기대어 , 아버지를 기다리는 그대의 모습이 떠오르고, 달빛 처연하고 바람 시리게 불며, 나무가 흔들리고 새가 울 때면 밤늦도록 책을 읽는 그대의 독서성(讀書聲)이 들리겠지.》
이용휴는 정기동 을 모범이라고 했다. 그런 모범이 일찍 저 세상으로 간 간절한 슬픔을 표현하되 특히 명(銘)에서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 기다리는 아들의 모습을 담았다. 여행에 빠진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의 모습은 글로만 보아도 처연하다.
기동의 외삼촌은 조카가 그토록 좋아하던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일찍 죽은 것을 상심해 그에게 , 가르치려던, 내용을 필사해 '칠등귀독편(漆燈歸讀編)'을 만들어 무덤에 넣어주었다고 한다. '
칠흑같이 깜깜한 등불 밑으로 돌아가 읽어야 할 책'이란 이름이니, 무덤에서나마 공부하라는 의미였다. 공부도 마치지 못하고 죽은 조카에 대해 애통해하는 마음이 뭉클하게 느껴진다.
명의 마지막 대목 '달빛 처연하고 바람 시리게 불며, 나무가 흔들리고 새가 울 때면 밤늦도록 책을 읽는, 그대의 독서성이 들리겠지'는 곧 아들의 환청 을 듣는 정란 을 묘사하고 있다.
정란은 기성사회의 관례와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렇기에 그의 행위 는 종종 비웃음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이용휴 는 수백 년 뒤 그에 대해 어떤 평가 가 내려질지 기다려 보자고 했다 (이용휴의 '바다 건너 한라산에 오를 사람을 보내며').
●정란은 산수에 관한 열정 하나로 자기가 좋아하는 여행에 인생을 바친 선비다. 그러한 독특한 삶 때문에 당시 아이들과 종들 조차 그를 '창해 선생'이라 불렀다 한다. 현대적 개념으로 보자면, 여행전문가 혹은, 산악인 !
●18세기 조선 땅 에서 '산수벽(山水癖)'만큼 은"정란"을 따를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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